박보마
전시전경
베이비. 갓 태어난 것을 부를 땐 순수를 은유하고, 연인을 부를 땐 욕망을 품은 말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언어는 가변적이고, 흐르는 시간 속에서는 체계와 논리조차도 변화하고 퇴색한다. 이번 사루비아 전시에서 박보마는 수많은 환생을 거친 베이비(Baby)로서의 페르소나를 드러낸다. 모든 것이 리셋된 베이비의 시선은 세상과 물질을 위계 없이 받아들이지만, 여러 번 생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스쳐 간 이미지들이 눈 속에 감광되어 체화된 감각으로서 잔류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눈을 통해 펼쳐지는 세상은 순수한 듯 어딘가 세속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질과 정보가 풍요를 넘어 과잉되는 세상에서, 결핍의 부재는 선택의 혼란을 야기한다. 내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은 정말 능동적인 감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어쩌면 욕망조차도 수동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박보마는 아기가 (다시) 태어날 공간과 핑크와 살구빛의 대리석 타일로 꾸며져 있을 그곳의 인테리어를 상상하고, 드로잉, 페인팅, 설치, 그리고 퍼포먼스를 통해 이 세계로 소환한다. 전시장에는 대리석 자재의 표면을 가장하고 그것의 감각을 대체하는 시트지가 둘러져 있다. 시트지는 표면을 가장하는 존재로써 가볍게 붙여졌다 떼어지기도 하지만, 텍스트나 색으로서 무언가의 지표가 되기도 하고, 인테리어 요소로서 벽을 꾸며 공간을 풍성하게 채우거나, 소중한 것을 보호하기 위한 피부로서 물체를 감싸기도 한다. 소모되면서도 무언가를 보호하고, 물질을 위장하지만 진짜로 감각되기도 한다. 사루비아의 전시장에서, 시트지는 산모의 뱃속에 스며드는 빛깔을 연상하는 살구와 핑크를 덧입고, 공간을 감싸는 피부와 유약한 이미지들의 양가적인 은유로서 펼쳐진다. 더 나아가, 박보마는 연계 이벤트인 「대리석(느낌 또는 그 부차적인 사건과 물질들)바닥 부분 야드 세일)」(2023)을 통해 시트지에 작품으로서의 시장가치와, 작가의 손에 의해 탄생한 온전한 원본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한다.
유동적 가치체계 속에서 도상, 언어, 이미지와 같이 지표가 되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지금'은 명확한 시점을 지시하면서도 알아차리는 순간 과거로 분산되어버리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세상은 시간 속에서 영원히 무너진다. 박보마는 시간에서 가장 잘게 부서져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을 위해 작업을 하고, 그것이 손안에 머물 수 있는 '지금'이라는 감각에 집중한다. 하찮게 여겨져 쉽게 소모되어버리는 것들, 미약해서 미처 깨닫기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빛처럼 선명히 감각되지만 잡히지 않는 것들을 작업으로 옮기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고, ❋페르소나를 통해 허구에 신체를 부여하거나, 웹사이트와 같은 가상의 공간을 통해 실체가 보이지 않는 내러티브를 펼쳐나가기도 한다. 박보마의 작업에서 '물질', '실체', '가짜'라는 단어는, 물질 혹은 사물들이 자본이나 사회 같은 시스템에 들어서는 순간 부여받는 계급 혹은 프레임을 구분하는 데 쓰인다. 가령, 물질(진짜)라고 불리는 것은 대개 '회사'와 같이 권력의 상징이 되거나 남성적(Masculine)인 것들이고, 가짜라고 불리는 것들은 그것들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며 종종 과소평가되는 빛, 순간, 여성성 등을 가리킨다. 박보마의 작업은 자본과 사회가 구획하는 가치 체계를 교란시키고 뒤엎는 방식으로 소외되는 존재들을 조명하고 위로한다.
박보마는 시스템이 적용되는 순간 물질로서의 위계에 밀려 함부로 대해지는 것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그런 존재들이 오히려 불평등함을 받아주는 것이란 상상을 하며 더 큰 포용력을 가진 존재로서의 위신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는 세상이 사라져도 머물지만 붙잡을 수는 없는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상투적인 이미지를 해체하고, 형태가 있지만 이름이 없는 모양들과 가짜라고 불리는 것들을 귀하게 드러낸다. 작가가 물질적인 것들의 지위와 쓸모를 뒤섞는 과정에서, 그 안에 숨어있던 감각이 불현듯 투명하게 떠오른다. 관람자는 수수께끼 같은 형상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잘 보이는 것, 욕망하는 것과 경계하는 것을 얼떨결에 발견하게 된다. 이미지는 그것에 길들여져 있을수록 더 잘 보인다.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작업에 다가갈수록 보게 되는 것은 반사되는 관람자 자신의 내면이다.
아이에게 언어가 스며들어 자신만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기 전까지, 언젠가의 우리는 가장 독창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읽고 말할 줄 알았었다. 그 말들은 어른들의 말을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지만, 천진난만하게 재해석된 아이만의 말이기도 했다. 숨을 타고 올라와 밀려 나오는 음절들이 부서진 말이라며 지위를 잃고 세상에서 배운 단어와 의미들로 대체되기 전까지, 모든 사물들은 부르는 대로 불렸고, 어떻게 말하든 같은 의미였다. 시스템은 언어를 통해 스며든다. 언어는 한 개인의 정체성이지만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유를 틀에 가두어 버리기도 한다. 사루비아에 펼쳐지는 Baby의 시선을 통해서, 시스템이 부여한 언어에 전복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의 가치체계를 해체함으로써 폄하되고, 왜곡되고, 도려내어지거나 명명되지 못한 존재들을 복권하기 위한 박보마의 다정한 실천을 지켜보자. ■ 문소영
* 댄서이자 반사체인 qhak, fldjf studio(2014~), Boma Pak by WTM deco, 사고로 양 팔을 잃은 러시아 남성 조향사 레버카 손(Rebecca လက်), (갤러리 SP, 2019, 서울), 박보마의 수호천사이자 독일계 아트딜러 Bomas Dueler(BCGM), (추상패배구슬들, 2021) 그리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감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 소피 에툴립스 실랑(Sophie Etulyps Xylang.Co, 웹사이트: www.s-e-x-co.com)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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