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김홍주
무제 한지에 색연필, 펜, 아크릴채색_74×100cm_2024
김홍주
무제 비단에 펜, 아크릴채색_35×110cm_1980년대 말
김홍주
무제 종이에 연필, 먹, 수채_59×81.5cm_2010년대
김홍주
무제 캔버스천에 아크릴채색_159.6×340cm_2013_부분
이 전시는 김홍주(b.1945) 작가의 회화를 드로잉의 관점에서 바라본 전시로 그의 팔십 평생의 화업을 돌아본다. 김홍주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오직 예술 안에서 찾으려 한 순수 예술론자로서 그의 예술적 열정은 도가적 우주론과 닮아있다.
드로잉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숯, 흑연 등을 종이 위에 그으며 시각적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그리기 수단이었다. 특히 드로잉의 전통적 역할은 본 회화 작업을 위한 스케치를 의미한다. 이러한 드로잉은 종이 표면에 그려진 선들과 그리는 사람의 감각을 즉시 이미지로 옮길 수 있는, 아이디어에 대한 작가의 자유분방한 정신이 투영된 즉흥적 미완성의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홍주가 텅 빈 캔버스 위에 세필로 그린 그림을 드로잉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세필의 가는 선과 점을 무한히 반복하여 겹겹이 쌓아 올리며 작업한다. 이때 세필의 그리기는 화면의 천이나 종이와 부딪히며 특별한 감각을 창조해 내는데, 바로 그어진 선들과 지워진 것들, 문질러 드러나는 얼룩 등과 같이 드로잉 고유의 감각과 동일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홍주의 회화를 ‘드로잉 같은 회화’, 또는 ‘회화 같은 드로잉’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김홍주의 독특한 그림 그리기는 전통 회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색채의 콘트라스트라든가 원근화법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재를 재현하거나 심상을 표현하는 데 골몰하지도 않는다. 드로잉 위에 색채를 덧씌우면 드로잉은 밑그림으로써 다른 무엇을 그리기 위한 지지대나 기초, 도구로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드로잉만으로 작품을 완성하게 되면 회화는 전통적 재현의 도구가 아니라 회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작가가 드로잉만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경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리 흔치 않다. 그럼에도 김홍주는 수십 년 동안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에 머무름으로써 ‘드로잉으로서 회화’, ‘회화로서 드로잉’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 혹은 ‘확장된 모호성’은 단순히 한 시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관류하는 핵심 요소이다. 김홍주가 드로잉을 닮은 자신의 회화에 대해 “나의 작품은 항상 미완성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작업은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강박과도 같은 작품의 형식을 품는다. 르네상스 화가들에게는 그들이 발명한 원근화법의 삼각형이야말로 세상을 이루는 변하지 않는 진리였고, 점묘파에게는 점이, 칸딘스키 같은 추상화가에겐 점, 선, 면이 세상을 규정짓는 기본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김홍주에게는 무한히 중첩된 부드러운 세필의 짧은 선들이 모든 형상의 기초가 되어 생명과 감각이 그 선을 통해 표출된다. 점과 면 사이에 존재하는 선의 이중성이 그의 회화의 근본적 토대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의 그림을 감상할 때에도 항상 멀리서 전체를 보고, 다시 가까이 다가가 세밀한 부분을 관찰해야 한다. 김홍주의 회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관객 스스로 창작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관람객은 작가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작자가 되어 자신의 감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그림이 보는 자의 맥락 속에서 경험되고 동시에 의미가 생성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관람객의 이중성은 물론 작가의 이중성도 가정한다. 그는 “내 그림은 쓰레기야”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의 무엇인가를 느끼고 촉발하게 해준 것의 ‘나머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김홍주의 작업에서 겹겹이 중첩된 수백 수 천개의 선들을 통한 시각적 모호성은 시각의 즉각성과 전체성을 거부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김홍주의 그림은 시간의 흐름을 중시하고 촉각적인 가려움을 유발하는 듯하다. 더 나아가 음악의 선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선의 세계에서는 안과 밖이 없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며, 공간의 구분이 있을 리 없다. 소리와 시간처럼 존재하면서 사라지고, 있음과 없음의 구분도 사라진다.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의 차이도 불명확하다. 그는 그것을 인간의 삶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계속 그림을 그린다. 나아가 김홍주는 “인공지능이 지배하게 될 미래에도 인간의 상상력과 생명을 느끼게 하는 아날로그 회화의 역할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대의 미술이란 어마어마한 스펙터클이 아닌 가장 사적이고 인간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배경을 비운 캔버스 천이라는 오브제와 무한 반복된 선 그리기가 결합된 이미지로서 작품이 탄생한다. 이러한 그림 그리기를 김홍주는‘촉각적 감수성을 만드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그리는 순간의 촉각적 경험이 전부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 그리기는 '액션적 행위'도 '심상의 표현'도 아니며 '페인터리' 하지도 않다. 오히려 ‘촉각적 감수성’으로 이뤄진 드로잉과 닮아있는 것이다.
1945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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