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정: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

2024.05.22 ▶ 2024.06.21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6길 4-3 (창성동)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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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희정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 2024, five-channel video(color), six-channel audio, 20 mins. 촬영: CJY ART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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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ess Release

    누구에게나 언젠가

    사라짐.
    자신의 그림자를 팔아 부자가 된 사나이가 있다. 그림자가 있어 평온했던 과거의 추억이 떠오르고, 그림자의 상실이 가져온 불안과 타인의 시선 때문에 부와 바꾼 삶이 불행하다. 한순간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고독한 삶의 경계에 선 사나이는 그림자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찾지 않는다. 그림자를 돌려받는 대가로 영혼을 달라는 악마의 요구를 그는 단호히 거절하며 인간이란 존재가 지녀야 하는 가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혼돈. 타국으로의 이주는 삶의 조건과 환경의 변화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온다. 함부르크에 작은 집을 소유한 집주인이 세입자를 선발하기 위해 까다로운 거주 자격 조건을 제시하며 고압적인 태도로 면접을 진행하고 있다. 비주류로 분류되는 삶은 내가 속한 집단과 내 존재를 객관화시켜 자각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한다.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주류·비주류의 구분과 관계 속에서 나의 사회적 위치를 찾는 일이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 극복하고, 나를 찾기까지 혼란의 시간은 고립과 소외,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인간으로서의 행복의 조건을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망각.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할머니가 기억을 환기시키고자 밀가루 반죽놀이에 집중한다.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지만 몸에 각인된 기억이 할머니의 삶을 되짚어 낸다. 생의 의지를 회복할 수 있는 기억을 남기려는 노력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밀가루 반죽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녀를 보살피는 가족들은 끝과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일상을 반복하며 지울 수 없는 아픔의 상흔을 새긴다. 삶의 의미를 되뇌며 견뎌내는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은폐. 팬데믹 시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56 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슬라임 유튜버가 등장한다. 슬라임 놀이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매끈함을 특징으로 촉각, 시각, 청각의 자극을 극대화한다. 변조된 화면과 음성으로 익명의 방송을 하고 있는 유튜버는 가상의 정체성을 내세워 책임을 벗어난 자유와 인기를 누리고, 경제적 수익까지 보상받는다. 온라인 세상을 통해 남다른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소비적인 유희와 쾌락적 경험을 선사한다. 구독자들 또한 즉물적인 감각과 반응에 열광하며 불특정 다수의 익명성이 가져다준 자유로움을 맛본다.

    제거. 데이터 라벨링은 인공지능이 특정 데이터를 학습할 수 있도록 목적에 알맞은 데이터를 수집·기록하는 것으로, 인간의 수작업을 통해 다양한 개체는 하나의 라벨로 특정되고 일반화된다. ‘인간’이라는 키워드 하나에 각기 다른 삶의 흔적과 과정은 무시되고 삭제된다. 예측 불가능한 세상을 살며 끊임없이 정체성을 고민하는 인간의 데이터는 이렇게 입력되고 학습된다.

    다섯 가지 에피소드는 다름 아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등장인물들은 기억의 존재, 정체성의 상실과 혼란, 은폐로 인해 각자 새로운 삶의 조건과 의미를 마주한다. 구분 짓기 위해 경계를 강화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끊임없이 조장하고 있는 세상과, 익명으로 또 다른 자아를 추구할 수 있는 가상의 세상이 공존한다.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적인 학습과 돌봄이 절실한 알츠하이머 노인 또한 인공지능이 ‘인간’으로 학습해야 하는 데이터 수집의 대상이다. 과정으로서의 인간의 삶과 흔적은 기록되거나 기억할 필요가 없다. 혼잡한 세상을 판별하기 위한 범주화의 기준은 효율성과 수익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최적화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1814)는 독일 함부르크를 배경으로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페터 슐레밀의 이야기이다. 최희정 작가는 이 소설에서 발췌한 문장으로 영상의 흐름을 엮어 나간다. 다섯 개의 채널을 통해 불편하게 교차되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은 양극화된 세상의 혼란과 혼재된 모순적 가치를 대비시킨다. 누군가에게는 없어져 사라질까봐 두려운 소중한 그 무엇이, 누군가에게는 드러내지 않고 제거함으로써 편리하고 효율적이다. 있음과 없음의 의미 부여가 극명하게 나뉜 세상의 접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간극은 점점 더 빠르게 커져만 간다. 기존의 인식의 틀을 뒤집거나 굴절시켜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이율배반적인 현실이다.

    알 수 없는 세상과 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항상 예술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이다. 예술가에게 그림자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세상과의 타협, 세상의 인정을 갈망하는 순간들도 많다. 그러나 그림자를 잃어버린 후 영혼마저 잃게 될까 두려운 사나이가 오늘날의 예술가 자신이다. 예술가로서의 나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마다 불안과 번민으로 가득 찬 혼란스러운 나 자신을, 언제까지 어디까지 지켜 낼 수 있을까. 세상을 향한 내 감각과 시선이 무뎌지지 않을까. 두렵고 냉혹한 현실을 살고 있다.

    인간은 어떻게든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예리한 통찰력과 창의력을 지닌 인간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사유’하고 ‘기억’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이렇게 탄생한다. 관계의 단절로 소외된 비인간적인 삶을 살면서도 영혼을 잃지 않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울림이 현재에도 전달되는 이유이다. 이 전시를 통해 작가는 구체적인 현실의 단면들을 끄집어내어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얻고, 대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인간이란 존재의 보편적인 가치, 삶의 의미가 “잃어버린 그림자”인 것이다.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 나는 무엇을 잃고 싶지 않은가.

    / 황신원 (사루비아 큐레이터)

    전시제목최희정: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

    전시기간2024.05.22(수) - 2024.06.21(금)

    참여작가 최희정

    관람시간12:00pm - 07:00pm

    휴관일월요일, 화요일 휴관

    장르영상

    관람료무료

    장소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Project Space Sarubia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6길 4-3 (창성동) 지하)

    후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연락처02-733-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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