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전설 철, 77x70cm, 1958
김종영
꿈 청동, 67x47x9cm, 1958
김환기
십자구도 종이에 과슈, 57.5x37.5cm, 1967
김환기
영원의 노래 캔버스에 유채, 162x130.1cm, 1957, 리움미술관
김환기
초가집 나무에 채색, 35x43cm, 1950
장욱진
얼굴 캔버스에 유채, 40x30cm, 1957
장욱진
마을 캔버스에 유채, 24x33cm, 1956
장욱진
물고기 캔버스에 유채, 27x45.5cm, 1959, 국립현대미술관
수난의 역사 속에서 피어난 세 송이 꽃 - 화가 장욱진 ․ 조각가 김종영 ․ 화가 김환기
최종태(김종영미술관장)
지난 한 세기 한국미술의 역사에다 불후의 명작들을 남긴 세분의 큰 예술가들을 여기 모셨다. 한 분은 충청도 한 분은 경상도 한 분은 전라도 삼남 (三南)의 천재들이 그가 아니면 이룩할 수 없는 숙명의 형태들을 이 땅에 남겼다. 그 분들은 일제의 식민통치시대를 살았고 남북분단 속에서 6․25의 전쟁을 보았고 그 밖에도 끝없이 펼쳐진 비통의 시간 속에서 하늘의 뜻을 주신대로 충실히 수행한 역사의 참 증인들이었다. 우리는 이들로 인해서 행복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얻었다. 장욱진, 김종영, 김환기 이 세 분의 예술가는 일제시대에 도쿄에서 공부한 세대들로 해방된 모국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창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남북전쟁의 와중을 살면서 각각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만들어 나갔는데 일본에 가서 서양미술을 익혔는데도 일본 냄새가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랄 수도 있겠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장욱진선생이 풍물꾼들을 불러다가 집 마당에서 노는 일이 더러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사물놀이란 말은 들어 본 일이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덕소화실 마당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의상을 갖춘 이들이 꽹과리 장구, 북, 징을 두들기며 열나게 놀고 있었다. 장욱진선생은 예의 특유한 모습으로 맨땅에 앉아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구경에 빠져있었다. 내가 옆에 앉아 있다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아악이란 것도 있는 데요” 선생은 듣는 기색도 하지 않고 표정이 바뀌는 기색도 없었다. 고급음악이 있는데 어째서 꽹과리냐 하는 나의 질문에 그냥 비켜서 대꾸를 하지 않는 것 이었다. 그것은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아니라 어떤 강력한 답으로 내 가슴으로 그렇게 들렸다. 장욱진선생의 예술이 민속이라는 쪽으로 열려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김종영선생이 학장 일을 맡고 있었던 시절인데 한동안은 파리에서 체류한 일이 있었다. 6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프랑스를 간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였는데 유네스코에서 그런 초청이 있었다고 들었다. 귀국하시고 얼마 후에 몇몇 친구들이 회식자리를 마련하였다. 아마도 내가 파리 다녀온 사람을 처음 만나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친구들도 다 그랬을 것이다. 사진으로만 보는 서양의 작품들이 실제 보면 어떨까 하는 점에 관심이 크게 가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이런저런 질문을 하게 된 것 이었다. 내가 이렇게 물었다. 자코메티는 어떻든가요. 선생은 아무 말씀도 없는 채 넘어갔다.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단 말이다. 브랑쿠시에 대해서는 답이 있었는데 쟈코메티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미술사의 주종을 크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와 이집트 또는 이성적인 성격과 영성적인 것 그림이 갖는 성격적 차이 그런 점에서 선생은 전자의 경우 즉 그리스와 이성적인 것 다른 말로하면 순수조형의지의 세계에 확고한 지반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훨씬 훗날 인도미술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 내가 물었을 때 에로티즘이라는 말로 말을 비켰다. 조각이란 것은 형태로서의 미로 족하다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싶다.
1970년 국전에서 나는 상을 받고 다음해 세계를 한 바퀴 도는 긴 여행을 하였다. 일본을 거쳐서 미국을 보고 유럽으로 가는 여정을 짰다. 친구들이 있는 지역을 먼저 들러서 여행경험을 쌓기 위해서 그랬다. 뉴욕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고 김환기 선생이 개인전을 열고 있는 포인텍스터화랑(Poindexter Gallery)을 찾았다. 작은 화랑이 아니었다. 꽤나 넓은 공간에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대부분이 점 시리즈 그림 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김환기선생의 마지막 전시회를 내가 본 것이고 그러니 만년의 그림들을 마지막으로 대면한 것 이었다. 그 전시회를 통해서 뉴욕화단에 선생의 그림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이었다. 새롭게 그린 큰 그림들이 한쪽 벽에 걸려있었는데 백호가 넘는 큰 화면 속에는 움직이는 선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점점(點點)으로 압축된 그림을 그리다가 그런 정지된 화면 속을 선들이 어떤 형상을 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네모 공간에다 운동을 주입한 것이었다. 이 양반은 다시 형상성을 찾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이 견디기 어려워서 점점을 연결해서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산들의 능선이 다시 나타난 것 같았다. 나중에는 하얀 선들이 구름이 가듯이 가로세로 화면을 누볐다. 별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화랑주인이 환기선생 집에 전화연결을 해주었다. 집으로 오라하여 찾아갔다. 점심때였던지 성찬이 준비되었다. 윤형근선생이 미리 편지로 내가 간다는 것을 알린 터였다. 밥상머리에서 내가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님의 그림은 달라졌지만 시성(詩性)만 은 여전 하던데요 그랬다. 자기는 그것을 극력 지우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체질이라면 어쩌겠나 그랬다. 서울에서 했든 모든 것을 지우려했고 그리고 다 지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다가 내가 시성이 여전하다고 말 했을 때 그것을 곧 대로 수긍한 것 이었다. 내가 시성이라고 말한 것은 서정이란 뜻은 아니었다. 뉴욕이라는 비정(非情)의 만리타국에서 김환기 선생은 모국에의 향수만은 지울 수가 없었든 모양이다. 비정(非情)속에서의 시성(詩性) 그것이 김환기가 아닌가 싶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선비는 청빈낙도라 하여. 재물을 취하는 것을 금기시 하였다. 요즈음은 자본주의 상업주의라는 말이 정당화되면서 딴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싶다. 이 분들이 살던 시대를 지나간 역사로 보고 그냥 접어도 될 것인가. 예술이 진리탐구의 중요한 가닥일진대 윤리와 도덕이 의당히 함께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세 분의 예술가는 그런 면에서도 흠 없이 모범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는 그림을 말하면서 그 예술가의 삶을 빼놓는다.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분들이 한참 때 우리사회는 기록화를 만들고 동상을 만들고 그런 일로 부산하였다. 미술가에게 돈 되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김종영선생은 그런데 한 번도 손댄 일이 없었다. 장욱진선생 역시 그런 일은 거들떠 본 일이 없었다. 해서는 안 될 일로 여기고 안한 것이지 하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은 천만에 말씀일 것이다. 무슨 이유였을까. 지재불후(志在不朽)라고 김종영선생은 붓글씨로 즐겨 쓰고 있었다. 직역하면 썩지 않을 데에다 뜻을 둔다. 뜻을 영원한데다 둔다는 말이다. 나는 심플하다라고 장욱진선생이 술이 취했다하면 내뱉는 말이었다. 깨끗한 것에 대한 염원이 그렇게 표현 되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흔하게 말하는 비움의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내게 이로운 것이 남한테 해로운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일러 선비정신이 높게 자리매김 되었다고들 말한다. 요새말로 하면 인문학적 교양과 옳고 그름에 대한 준열한 판단 의식을 존중했다는 말일 것이다. 장욱진 김종영 김환기 이 세분은 그런 면에서 20세기를 수놓은 그야말로 마지막 한국의 선비라고 말해서 틀리지 않을 성 싶다.
여기 세 분의 예술가는 그 누구보다도 모국의 역사를 존중하고 모국의 문화를 사랑한 분들이었다. 이 분들의 형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애절하리만치 선조들의 마음을 읽으면서 생각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장욱진선생의 화면에 등장하는 초가집과 참새와 돼지와 까치들 김환기선생이 즐겨 다룬 항아리와 학과 소나무와 구름들을 눈여겨보자. 그는 또 어떤 글에서 나는 동양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며 파리에 나와서 보니 고향하늘이 더 잘 보였다라고 쓰고 있다. 김종영선생이 어려서부터 다룬 붓글씨를 통해서 그의 동양 철학에 대한 통찰이 얼마나 깊고 높은가 짐작할 수 있다. 세계를 열어놓고 수용하는 마당에서 「나」라는 역사적인 기반이 없다면 오직 자멸(自滅)만이 있을 뿐이다. 이 분들이 그처럼 단단한 형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모국에 대한 큰 사랑과 깊은 이해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방하고 수용하는 것만 있다면 자칫 정체불명의 형상이 될 것이고 민족적인 데에다 고집하면 소통이 막힌 왜소한 형상이 될 것 이었다. 일생을 바쳐 형태를 탐구하면서 안 생각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많은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가 필요하였다. 각각의 독특한 멋스러움 속에 맑고 고격(高格)함 속에 조선의 백자와 같은 내강(內剛)함이 있다.
맑은 그림 밝은 그림 순직한 그림. 그러면서 뼈대가 더 없이 강건한 그림들을 그분들이 만들었다. 일찌기 없었던 고되고 험난한 역사를 살면서 어찌 이런 꽃 같은 그림들을 그려낼 수 있었던가. 이분들의 공통한 점은 열린 세계의 복판에서 세계미술의 역사를 조망하고 나름대로의 조형세계를 확실하게 구축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동시대에 누군가가 생각했어야하는 그런 일을 해 놓고 후배들한테는 이정표가 되었다. 예술이란 것은 현실이 종합돼서 그것이 녹아서 전혀 새로운 형상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옛것을 살펴서 새로운 것을 얻는다는(溫故而知新) 그 말 그대로 여기 이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을 지금 우리가 확실하게 보고 있다. 몇 사람의 큰 예술가들을 남겨놓고 격동의 그 시대는 갔다. 우리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1915년 경상남도 창원출생
1913년 전남 신안출생
1917년 충남 연기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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