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균
감(Persimmons) Acrylic on Canvas, 160x80cm(each), 2010
오치균
감(Persimmons) Acrylic on Canvas, 160x80cm(each), 2011
오치균
감(Persimmons) Acrylic on Canvas, 160x80(each), 2009
오치균
감(Persimmons) Acrylic on Canvas, 120x120cm(each), 2011
<어지러운 색을 다스리는 시간의 빛>
잎들이 소임을 다하고 물러간 자리에서 열매와 가지가 돌연히 생명의 경이를 품어내고 있다. 가지는 휘모리, 자진모리, 중모리로 뻗어나가며 불협화한 가락을 만든다. 비틀리고 꺾이고 돌아서고 기울어도, 나무에는 무질서가 없다. 사람의 눈에 괴이(怪異)한 형체가 나무의 몸에는 여상(如常)하다. 나무는 어지러움[亂]을 제 몸으로 다스린다[治].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질서나 무질서, 조화나 부조화 같은 개념화된 양식을 훌훌 벗어버린 공간 속으로 뻗어나간다. 살아있는 것의 리듬이 무릇 저러하리라. 이 리듬은 내재적인 충만과 평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으로 돌출한다. 오치균의 나무는 아연 동물적이어서 살아 움직이는 가지에서 타악기의 박자가 들린다.
나는 경기만의 갯벌 가장자리 마을에서 산다. 내 마을의 저녁은 고요하다. 시선은 닿는 곳이 없어서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가는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이 맞물리면서 갯벌과 하늘은 현재형의 시간으로 가득 찬다. 맑게 저무는 저녁에 내 마을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알았다. 아, 저것이 오치균이 그린 감나무의 하늘이로구나…
감나무의 하늘은 시간의 켜를 이루고 켜켜이 시간이다. 거기가 지금 몇 시인지는 알 수 없다. 거기의 시간은 계량되지 않고 분절되지 않는다. 시간은 새벽인지, 저녁인지, 밝음인지, 어스름인지를 구별할 수 없다. 시간은 들고 나면서 지속된다. 거기의 시간은 중층구조로 흘러가는데, 이음새가 없고 꿰맨 자국이 안 보인다. 내 살아있는 날들의 모든 새벽과 모든 저녁의 시간이 저러하였다. 그 새로운 시간은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 위에서, 그것과 더불어, 거기에 실려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시간이다.
오치균의 감은 땅속의 물과 함께 하늘에 가득 찬 시간의 자양을 빨아들여서 쟁여놓은 열매다. 이 열매의 빛은 시간의 빛이다. 하늘은 동트거나 혹은 저물어 가는데, 이 흐름 속에서 신생의 빛들이 태어난다. 시간은 운동태로서 살아 있고, 공간 속으로 번져서 가득 찬다. 감나무의 하늘은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다. 가지들은 아무런 작위가 없이 뻗어나가고 출렁거리면서 이 시간과 공간을 휘젓는다. 가지가 뻗어나갈 때, 그 배경이 되는 시공은 물리적 현상을 벗어나 생명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거기에서 리듬이 발생한다. 가지들의 리듬은 시간과 공간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영역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 위에서 놀 수 있고 살 수 있고, 나무를 심을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놀이터 겸 삶터로 바꾼다.
구부러진 줄기에는 노년과 신생이 공존하고 있다. 줄기는 늙어서 다시 새롭다. 줄기의 노후(老後)는 노후(老朽)가 아니다. 늙어도 낡지 않는다. 감들은 가지 끝에 매달려서 하늘에 박혀 있다. 박혀 있으되 감들은 매달린 존재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감들은 열려있는 열매의 모습으로 시간과 공간에 처해 있다. 감들은 주렁주렁 열려있지만, 다수로서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감들은 개별적 실체로서 홀로 충만하다. 그것이 조밀하게 그렸지만 답답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감들은 처(處)한 곳의 주인이다. 감들의 농도와 표정은 제 가끔이다. 형질(形質)이 닮으면 기운(氣韻)이 사라진다는 비의(秘義)를 오치균은 안다. 감 한 개마다 그 배경이 되는 하늘의 색을 빨아들이고 있다. 감들은 시공 속으로 스며들거나, 시공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배어나오고 있다. 하늘의 색이 짙어지면 감들은 더욱 짙어져서 배경에 침투한다. 그래서 감들은 가깝거나 멀고, 명료하거나 풀어져 있다. 감들은 시간과 공간의 정수를 함축해서 색에서 빛으로 건너간다. 감들은 등불이 켜지듯이 나뭇가지에서 스스로 발화하는 빛처럼 켜져 있다.
오치균이 보여주는 등불의 질감은 강력한 육체성이다. 오치균의 색은 움직이는 살이나 뼈와 같다. 기골(氣骨)이 꿈틀거리고 혈육(血肉)이 느껴진다. 그의 색은 만져질 듯한 질량감을 갖는다. 색의 질감은 색을 쓰는 방법에서 나온다. 그의 색은 몸으로 주물러서 빚는다. 주물러서 나오는 색으로 하늘과 가지와 열매를 그려냈으니 생물의 실촉(實觸)이 또한 무성할 수밖에 없으리라.
저 명나라의 기특(奇特)한 화가 서위(徐渭)가 일찍이 자부했다. ‘형태의 닮음을 얻으려 하지 않고 살아있는 기운을 찾으니(不求形似求生韻)/ 모두가 내 다섯 손가락의 마름질에 바탕을 둔 것이네(根據皆吾五指裁)’ 실로 그러하구나. 뜻이 족함을 얻었는데 구태여 낯빛을 따로 논하겠는가. 오치균의 감은 그 색에서 벌써 빛이 환하다. 등불이 하나 둘 켜질 때마다 생명은 놀랍고 새롭다. - 김훈(소설가)
<오치균의 감을 사유하다>
I. 오치균이 감(나무)을 그리기 시작한 때도 이제는 꽤 오래 되었다. 1998년경으로 오랜 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의 시골 풍경을 접하면서부터였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의 풍광이 자신의 본능적 감성의 원천이 되었다는 깨달음”을 피부로 느끼면서, 가을의 감이 달린 감나무의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물론, 화가가 제일 먼저 떠올린 기억의 단상은 어릴 적 그가 겪었던 감과의 투쟁(?)이었다. 배고픔의 어린 시절을 경험한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과의 추억 같은 투쟁들--하나, 둘쯤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으리라. 오치균의 감과의 투쟁은 적어도 필자보다는 더욱 심했던 듯싶다. “그렇게 지겨웠던 감나무와의 투쟁이 아직도 계속됐다면, 난 감을 먹지도 않았을 테고 감히 사치스럽게 그것을 화폭에 담을 수도 없었을” 정도로 그에게 감은 어린 시절의 가난을 떠올리는 아이콘(icon) 같은 것이었다.
그러더라도, 가난과 동시에 “청명한 가을하늘을 이고 있는 단풍든 가을 감나무”의 정겨움은 화가의 뇌리에 깊이 박혀 한국의 시골 풍경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굳혀져 있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감(나무)은 한국인의 가을 마음과 같다. 감(나무)의 서정성의 백미는 늦가을인데, 그것도 잎새가 다 떨어진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진홍빛 감. 물론, 그것의 배경은 파란 가을 하늘이 제 격이다. 가을내내 울쿼 먹고 홍시는 따먹다가, 남으면 독에 쟁여놓고, 겨울내내 얼려서 퍼먹던 유일한 우리네 겨울의 과일--그것이 감이었다.
그것은 요즈음의 젊은 세대들이 갖지 못한, 아니 가질래야 가질 수도 없는 정서였다. 외래종의 과일이 판을 치면서 누가 감을 먹어? 바나나나 먹지. 계절과 과일이 일치하지 않는 요즈음의 세상에 ‘가을과 감’?--이제, 감은 우리의 정서와 기억에서 밀려나간 대표적인 과일이 되었다.
II. 그렇다 하더라도, 오치균의 최근 감 그림을 사유해보자. 2003년 9월, 화가는 ‘감 그림’만 모아 개인전을 한 번 열었다. 그 때의 작품들은 대부분 ‘감이 있는 풍경’들이었다. 예를 들어, 집 앞(뒤)의 감나무, 골목에서 바라본 시골 담장과 감나무, 곶감을 만들려고 처마에 매달아 놓은 풍경 등, 감이 주제였지만 그것은 풍경의 한 부속품 같은 느낌이었다. 당연히, 풍경을 위한 원근의 공간이 깊이감도 가졌었고, 풍경을 바라보는 시점도 갖추었다. 여전히, 오치균 특유의 두터운 임파스토의 물감층들이 화면의 밀도감을 높여 주었다.
이번 전시의 감(나무) 작품은 그동안의 오치균의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사뭇 다른 느낌이 있다. 이것은 분명 ‘감을 그리는’ 스타일이 변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거의 감이 ‘풍경의 감’이었다면 그래서 더욱 ‘서정적’이었던 반면에, 지금의 감은 오히려 ‘관념의 감’에 가깝다. 유화이지만 물씬 동양화의 느낌도 든다. 오치균 답지 않은 웬 동도서기(東道西器)? 아니면 서도동기(西道東器)?
의아스럽지만 그렇게 의아할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오치균의 대학시절, 그의 미술대학 회화과는 지금처럼 동, 서양화의 구분이 교육적으로 그렇게 심화되지 않았었다. 회화과 학생이면 누구나 동, 서양화의 기본은 갖추고 졸업했다. 때문에, 지금의 화가의 작품에서 동양화의 ‘아우라’가 있다 해도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며, 매우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작품을 들여다보자. 무엇이 동양화의 분위기를 자아내는지.
1) 우선, 캔버스의 조합이 우리의 병풍을 연상시킨다. 물론 서양의 전통에도 두 폭, 세 폭의 제단화, 또는 그것들이 변형된 조합들도 있지만, 단아한 청색의 배경에 제멋대로 뻗은 감나무의 가지와 진홍빛의 감들이 보다 장식적인 ‘병풍그림’의 느낌을 준다.
2) 작품의 화면에서 ‘가상공간’의 깊이가 없어지면서, 오히려 평면의 조건을 즐긴 것 같은 작가의 ‘유희적인’ 태도가 깃들여 있다. 이것은 마치 옛 선비들이 흥과 여기로 즐겨 그리던 ‘매난국죽(梅蘭菊竹)’을 다루듯 그런 세심함과, 그러나 무언가 흥이 있어야 붓이 절로 따라오는 그런 즉흥성 같은 것이 느껴진다.
3) 때문에, 색감보다는 선의 운용이 더욱 두드러진 평면 공간임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동양화의 정서를 풍미하는데--예를 들어, 전혀 대칭적이지 않은 멋대로 뻗은 감나무의 가지와 거기에 매달린 감이--마치, 가지의 선을 따라가다 보면 감을 저절로 만나는 것 같은, 즉 선(線)의 기운이 부각된 화면이다. 아마도 화가는 나무가지 그리고 난 후에 감을 그렸을 것이다. 일필휘지(一筆揮之)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상, 난을 치듯 선으로 가지를 운용하고, 거기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기분으로 꽃처럼 감을 찍었다. 매화가지에 매화를 찍듯이.
4) 감과 가지의, 즉 대상의 ‘즉물성’이 두드러지는데 이로 인해 더욱 촉각적인 느낌이 강렬하다. 청색의 배경을 평면처럼 단순하게 처리한 바탕에, 마치 실제의 가지를 화면에 붙인 것 같은 두터운 물감층이 입체감을 형성하면서 내는 효과이다.
이와 같은 요소들이 오치균의 이번 작품에 나타난 변화들이다. ‘감’을 그린 여러 형태들의 그림들이 있지만, 동양화와 서양화의 전통적인 맥락에서의 어느 접점쯤에서, 화가는 그가 구사했던 기존의 ‘재현’의 주관성을 넘어 보다 객관적인 태도로서의 ‘관념적인 감’을 그려냈다. 이것이 오치균의 이번 전시의 성과다. - 정영목 (서울대 교수)
1956년 충남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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