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I Never Read Wittgenstein Singlechannel Video Installation with Four Monitors on the Wall Painted in Seven colors_Ed12, 가변설치, 1998
백남준
Reclining Bronze Buddha Bronze Buddha Televisions Laser Disc players Laser Disc Remote Controls, 20.5x38x38cm, 1996
NAM JUNE PAIK
세계적인 비디오 위성쇼로 자신의 존재를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에게 알린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Paik, Nam June, 1932-2006)은 일반에게 생소하기만 하였던 비디오라는 매체를 하나의 예술장르로 발전시킨 인물로 이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정도다. 1962년 첫 플럭서스 퍼포먼스를, 1973년에는 그의 첫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하여 비디오와 행위예술분야에서 일찌감치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영원한 이방인이자 선구자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백남준 선생이 그의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실험하고 성취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젼>은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아트가 시작되는 의미 깊은 전시였다. 이 전시회로부터 백남준에 의해 하나의 예술장르로 수립된 비디오 아트는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의 회고전에서 비로소 공인받기 시작하였다. 휘트니 미술관의 회고전은 백남준이 1960년대 ~ 1980년대까지 20여년간 제작해온 비디오 작품은 물론 해프닝의 잔재들인 음악적 오브제와 지나간 해프닝을 재연하는 공연까지 마련하여, 해프닝에서 비디오로 이어지는 백남준의 전 작업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60년대 ‘장치된 TV’로 부터 70년대 휴대용 비디오 시스템과 비디오 신서사이저의 도움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 그리고 80년대 인공위성의 활용으로 이어지는 위성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백남준 예술의 핵심개념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관객참여, 참여예술(interactive art)이라 하겠다. 이 참여의 문제는 관객을 작품에 참여시킴으로써 상호소통적인 예술이 되고자 하는 해프닝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백남준은 그의 비디오 예술을 통하여 관객참여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 다시 말해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상호 소통적인 예술이 되는 과정, 즉 참여 예술인 ‘해프닝’의 연장선 위에 놓이는 ‘참여 TV과정’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렇듯 관객 참여는 해프닝과 비디오아트를 소통의 예술로 만드는 백남준의 독특한 장치이자 그의 예술의 핵심개념이라 할 수 있다.
태창방직을 운영하던 거부 백낙승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던 백남준은 이후 일본과 독일 그리고 미국을 거치며 음악가이자, 시인, 그리고 비디오 아티스트로 탄생하였다. 백남준은 동양과 서양, 미술과 음악, 순간과 영원 그리고 기계와 인간 등 서로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과 합일을 그의 예술을 통해 일관되게 실험하고 추구하였다. 삶의 대부분을 서양에서 보냈음에도 정신만은 동양철학에 입각해 자신만의 시간의 개념을 표출하는 백남준의 비디오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영상이미지 속에서 현실적 시공감각을 잃고 그가 제시하는 시간을 명상하게 한다.
지난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그의 반세기에 이르는 예술세계를 정리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고, 2008년 10월 9일 경기도에 백남준미술관 개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백남준 아카이브 설치, 그리고 향후 3년간 백남준 선생의 삶과 예술의 여정을 돌아보는 세계미술관전시 등 작가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정리하는 활동이 국내와 해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리안갤러리에서는 2010년 첫 전시로 백남준 작고 4주년을 기념하고 그의 예술세계를 지역에서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자 이번 전시를 준비하였다.
I never read Wittgensten, 1998
‘나는 비트겐슈타인을 읽지 않는다’ 1998년은 텔레비전 화면조정시간에 방송되는 TV 줄무늬 패턴에 7가지 색을 적용해 벽화를 그리고, 이 벽화가 그려진 벽면 네 모서리에 TV 모니터 4대를 설치한 작품이다. TV 화면 속에서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스쳐지나가는 영상으로 대개 스토리가 없는 파편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보는 그대로의 것과 순간적인 이미지를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구조주의의 언어철학과 논리적인 언어를 표방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읽기’를 조롱이라도 하듯, 백남준의 영상은 이렇게 논리와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말하기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Reclining Bronze Buddha, 1996
백남준의 비디오 조각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인 1990년대에 제작된 작품으로, 두개의 레이저 디스크가 송출하는 영상이 역시 두개의 TV 화면에 나오는 작품이다. 백남준 선생의 사물과 자아 그리고 기록된 영상과 현재시간 속 오브제와의 인터렉티브한 관계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I wrote It in Tokyo in 1954, 1994 (Music Box)
"나는 이 곡을 1954년 도쿄에서 썼다" (1994)는 백남준의 뮤직 박스와 (1954년 도쿄에서 작곡된) 음악작품에 부여된 제목이다. 이 음악작품은 144개의 음표로 구성된 하나의 악장을 바탕으로 연주된다. "뮤직 박스"는 "18세기 TV" (1960년대 말), TV 촛불 (1975), TV 부처 (1974) 등 백남준이 친근한 형식으로 창조한 작품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통합한 듯 기술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백남준은 1954년 음악작품을 18세기 이후 변화를 겪지 않고 본질을 유지해온 음악장치 속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그 악장을 다시 1950년대 생산된 낡은 텔레비전 속에 집어넣는다. 스크린 위에 나타난 몽롱한 이미지 (hypnotic image)는 회전하는 뮤직 박스의 기계장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실제 기계장치가 아니라 텔레비전 내에 설치된 카메라에 의해 실시간으로 포착되어 투사된 이미지이다. 백남준은 현대적인 전자적 이미지를 우리에게 편하며 친근하고 오래되고 낡은 텔레비전과 200년이나 오래된 뮤직 박스의 전통과 결합시키고, 이를 통해 초현실주의, 시, 그리고 다소간의 과장 (a little bit of camp)이 뒤섞인 대상을 창조한다.
Video Sculpture_혁명가 로봇시리즈
백남준의 조각적 설치작업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분야는 그의 강한 예술적 환상을 대변하는 로봇 제작이다. 백남준의 로봇에 대한 환상과 집착은 기술과 인간의 통합을 시도하는 그의 남다른 관심을 반영하는데, 그의 첫 로봇은 1974년의 로봇 K-456 으로 그것은 전자적 ‘레디메이드’로 구성된 일종의 전자자동 인형이었다. 리모트 컨트롤로 자동조작이 가능한 이 로봇은 80년대 말에 이르면 조각적 로봇, 즉 TV수상기로 구성하는 수상기 로봇을 만든다. 고립된 현대인간이 아니라 동고동락하는 인간의 원형을 찾기 위해 하나보다는 짝을 이루거나 가족적 차원의 군상을 만들게 되는데, 1986년 뉴욕 홀리 솔로몬(Holly Solomon)화랑 개인전에 출품한 로봇가족은 1950년대 TV수상기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들고, 70년대 TV수상기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고 최신식 소형 수상기로 손자손녀를 만든 3대에 걸친 로봇 가족이다. 일본, 독일 그리고 미국으로 이어지는 백남준의 오랜 해외생활은 그로 하여금 가족과 정신적 근원에 대한 향수를 갖게 하고, 백남준의 조각적 설치작업 중 로봇가족 시리즈는 이러한 그의 가족에 대한 향수가 반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전시되는 작품은 로봇혁명가 시리즈로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판화작품이다. 8개의 판화가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이 작품은 마라, 다비드, 로베스피에르 등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들을 로봇조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각 장마다 혁명과 관련한 내용과 백남준 선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Charlotte Moorman & TV Cello
독일에서 미국 뉴욕으로 건너온 백남준이 첫 번재로 벌인 퍼포먼스는 샬럿 무어맨과 함께 1964년 8월 져드슨 홀(Judson Hall)에서 열린 2차 뉴욕 전위예술제에 공연이다. 저드슨 홀에서 무어맨은 정장차림으로 공연을 시작하였지만 곧 백남준의 지시를 따라 차례로 옷을 벗으면서 연주를 이어갔다. 샬롯 무어맨은 백남준의 음악과 미술을 연결하려는 퍼포먼스 시도에 다시금 불은 붙인 중요한 인물로 독일에서의 퍼포먼스 이후 백남준의 뉴욕 퍼포먼스 시대를 열게 하였다. 백남준은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비디오에 전념하기 위해 음악과 퍼포먼스를 완전히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없이는 나의 독일 이후의 퍼포먼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말했다. 미국에서의 첫번째 공연 이후 1965년 그는 성인만을 위한 첼로소나타 1번(Cello Sonata No. 1 for Adults Only)를 공연했다. 이 공연에서 무어맨은 바흐(Bach)의 음악을 연주한 뒤 옷가지를 하나씩 벗기 시작해서 거의 완전히 나체가 될 때까지 연주와 옷 벗기를 반복했다. 또 1967년에는 오페라 섹스트로니크(Opera Sextronique)를 함께 연주하였는데 이 공연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서 중단되었다. 네 개의 아리아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무어맨은 어둠 속에서 조그만 전구로 장식된 비키니를 입고 첼로를 연주하거나 상반신을 벗은 채 이상한 마스크를 벗었다 썼다 하면서 첼로를 연주하였다. 이 연주로 백남준은 무죄를, 무어맨은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백남준 이 음악에 대해 성을 도입하려 한 시도는 음악 자체를 통하여 실현된 것이라기보다는 시각적으로 충족된 것이지만, 누드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음악 공연에 있어서 정장을 갖추는 관습에 대한 정면공격으로 백남준과 무어맨의 행위는 관객을 도발하고 중산층의 보수주의를 공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9년에 제작된 샬롯 무어맨의 네온첼로와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 백남준 회고전에서 샬롯 무어맨과 펼쳤던 퍼포먼스를 담은 사진작업을 선보인다. 무어맨의 네온첼로는 뉴욕에서 백남준과 함께 벌인 퍼포먼스에서 가장 중요한 오브제였던 첼로를 재현한 작품으로, 검은색의 배경은 당시 보수적인 사회의 분위기를, 형상을 감싸는 붉은 네온은 그녀와 백남준의 새로운 해석과 시도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 김혜경 큐레이터
1932년 서울출생
차영석: Jouissance
이화익갤러리
2024.11.08 ~ 2024.11.28
제15회 畵歌 《플롯: 풀과 벌의 이야기 Plot: The Story of Wild Grasses and Bees》
한원미술관
2024.08.29 ~ 2024.11.29
오종 개인전 《white》
페리지갤러리
2024.10.11 ~ 2024.11.30
박진흥: 광기 光記 드리워지다 Archive of the Light: Cast
갤러리 반디트라소
2024.11.06 ~ 2024.11.30
김선: 빙렬, 마음새-몸새-이음새
갤러리 나우
2024.11.05 ~ 2024.11.30
여세동보 與世同寶: 세상 함께 보배 삼아
간송미술관
2024.09.03 ~ 2024.12.01
2024 광주비엔날레 기념특별전 《시천여민 侍天與民》
광주시립미술관
2024.09.06 ~ 2024.12.01
무등: 고요한 긴장 Equity: Peaceful Strain
광주시립미술관
2024.09.07 ~ 202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