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아이방 oil on canvas, 155x180cm, 2009
이은희
끝나지 않은 풍경화 Oil on canvas, 250x200cm, 2010
이은희
여행객 Oil on canvas, 150x200 cm, 2010
유토피아의 흔적
이병희(갤러리정미소 아트디렉터)
이번 갤러리정미소에서의 [진부한 풍경] 개인전에서 작가 이은희는 대략 2008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는 큰 규모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작가의 풍경화들은 2003년경, 작가가 독일에 유학을 간 시점에서부터 작년 한국에 귀국하여 활동을 새롭게 시작한 2010년 현재까지 지속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는데, 물론 지금의 그림들은 훨씬 더 장대해졌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그림은 자연과 인간을 소재로 하되, 일상적인 풍경의 차원에서 벗어나 ‘자연’이란 소재가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 작가의 그림에서 자연은 더 이상 인간 삶에서의 주변 풍경의 차원이 아니다. 자연이란 소재는 환상적인 공간으로, 때로는 잃어버린 낙원처럼, 때로는 우리를 위협하는 절대적인 대상처럼, 때로는 안락한 꿈과 안식의 공간 등으로 확장되어 있다. 게다가 작가의 표현 방식은 넓은 붓을 사용한 시원하고 과감한 붓질이 특징적이며 그것을 통해 화면 전체에 매우 적극적으로 그 물성을 노출된다. 그러다보니 여기서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때로 덧없고 불완전한 관계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 통일성 있게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의 2003년경부터의 풍경들부터 반추해보면, 처음에 그녀의 소재는 주변 풍경들이었다. 여기서의 자연은 처음에는 낯설지만 친숙해질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으며, 이웃을 만들 수 있는 그러한 자연이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더라도, 그녀가 자연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낯선 곳에서 그 곳에 익숙해지고 살아가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작가는 독일에 처음 가서 정착하게 된 도시(동네) 풍경, 그 중에서도 자연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풍경은 여러 정서들을 담고 있다. 선명한 빛과 그림자가 대조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 추상적으로 처리되기도 한 초기 풍경들은 낯섬, 설레임, 걱정, 호기심, 그리움, 두려움이나 불안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즉 그녀는 주체를 불안케 하며 주체와는 항상 긴장의 관계에 있는 타자라는 자리에 자연을 놓은 것이다.
이제 그 자리가 어떻게 주체를 괴롭히고, 주체를 흔들어 놓으며, 바로 그 자리를 통해서 주체를 새롭게 드러나게 하는가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특별히 최근 작업에서 두드러진다. 이는 이은희 그림에서의 생생한 붓의 표현과 그것이 전체 화면에 부과하는 유동성의 성격, 인물들이 마치 노출을 길게 한 사진의 그것처럼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점, 또한 아이들이 자주 등장하는 점, 그리고 전체적인 구성에서 인간이 크기가 작다고 해서 부차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자연의 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점 등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노트 중에서 인용하자면, “나는 아름답고 위대하며 때때로 두려운 자연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원초적인 자연과 더불어 살던 그때를 그리워한다. 또한 나의 애초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 향한다. 나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심은 다각적인 실험을 통해 거대한 자연으로의 인간의 회귀를 위한 길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 라고 한다. 즉 작가에게 자연은 그리움에 대한 것이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은 여러 면에서 시사적이다. 지금과 같이 지구온난화와 여러 대규모의 자연 재해, 기후 이상 등의 환경에서는 말이다. 우리에게 자연은 가이아같은 모성, 즉 우리를 잉태하였고 우리를 자라게 한 생명의 근원이자 우리를 거두어 가는 두렵기도 한 대상인지도 모른다. 한때 자연은 에덴 혹은 낙원이었으나, 근본적인 인간의 원죄가 시작되면서 인간의 세기라고 부를 수 있는 근대라는 과정을 거쳐서, 정복하고 극복해야하며 인간의 발전된 삶을 위해서 개발시켜야하는 타자였다. 그리고 자연은 이제 최근의 녹색혁명과 녹색경쟁에서 보듯이 우리가 새롭게 개발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 이래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돌이켜 보더라도, 지금 우리가 품고 있는 어떤 근원적인 자연에 대한 그리움, 즉 이러한 ‘노스탤지어’가 발생하는 근원은 적어도 아름다웠다고 가정되는 어떤 환상의 세계에 대한 것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상실되었다고 가정된, 혹은 미래의 어떤 환상의 세계에 대한 것일 것이다.
그것이 이제 지극히 타자들을 마치 주체와는 관계가 없는 냥 타자화시키면서 구축했던 영역 너머에서 귀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에게 이은희의 그림들은 전체가 어떤, 무엇인가의 흔적처럼 보인다. 이은희의 그림에서 내가 읽어내는, 유토피아에 대한 그리움은 단지 어떤 느낌의 차원이기도 하며 어떤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이다. 여기서의 동경은 그것의 대상을 궁금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무엇이 그렇게도 소중한 것을 상실하였기에 그것을 그토록 그리워하느냐의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은 ‘없다’ 라고 하는 편이 낫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경이라는 행위 자체이다. 내가 보기에 이은희의 그림은 그 동경이라는 행위의 ‘자취’가 된다. 여기서 자연을 그리고 있는 이은희의 그림에서 자연을 뚜렷한 대상으로서 지칭하지 않고, (상상적) 유토피아에 대한 노스탤지어라는 행위의 흔적이라고 바꿔 말하는 것은, 애초의 자연의 모습을 우리가 정확하게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노스탤지어의 기원이 현대 주체의 ‘성찰’들을 담고 있는 어떤 징후들이기 때문이다. 그 성찰은 ‘이것은 아니다’에서 출발하여 ‘그렇다면 이러한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것에 대한 희망까지 담고 있다. 그래서 이은희의 표현특징과 구성상의 특징들은 확장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이제 이은희 그림에서의 소재를 더 이상 자연이라고 하는 대신에,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과 그것의 흔적이라고 바꿔서 이야기해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그 흔적은 잠시 아름답거나 숭고하거나 두려운 자연이라는 외관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흔적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번 전시에서도 소개되는 [무제 시리즈](사실상 작가는 정확하게 시리즈 라고 명칭하지는 않았다)와 [끝나지 않은 풍경화], [아이방], [여행객] 과 같은 비교적 큰 규모의 작품들은 최근의 경향을 대표한다. 이 중에서도 작가의 자식을 포함한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인상적인데, 아이들은 거대하고 무한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생생한 붓질과 그 안에 마치 새겨지듯 혹은 그 흐름에 동화되거나, 아니면 그 흐름의 한 단편처럼 각인되어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반면 비교적 또렷하기 때문에 매우 강하게 부각된다. 통일성 있게 붓질된 표현 속에서 이 동시성과 또렷함과 일시성이 동시에 부여됨으로써, 이 흔적은 단순한 풍경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사라질지도 모르고, 사라진지도 모르고, 다시 태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의 ‘흐름’ 자체가 된다. 아마도 노스탤지어와 성찰과 희망의 흔적이라고 다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흔적 속에서 어떤 희망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양가적이다. 그것은 체념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슬픔의 다른 말일수도 있고, 말 그대로 막연하고 일방적인 어떤 소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파괴의 현장 속에서도 천진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혹은 처음에는 칠흙같이 컴컴한 밤하늘에서 별들이 총총 빛나는 줄만 알았던 어떤 반짝이는 것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이었다던가 하는 것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동경과 그리움은 상실에 대한 반응(슬픔과 성찰 등과 같은)일 뿐 만이 아니라 동시에 희망에 대한 염원을 암시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우매한 것이기도 한 것이고, 매우 절실한 것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미국의 텔레비젼 뉴스를 보다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중국과 미국의 에너지 소비량을 비교하는 것을 보았다.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중국에서 얼마나 빠르게 그린 에너지 개발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미국이 이것을 빨리 따라잡아야한다는 것이 주된 메시지였다. 어쩌면 그린 에너지 개발을 하는 것으로 경쟁한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깨끗한 물을 사먹게 되었고, 공기가 맑은 곳의 집값이 오르게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켜볼 때, 얼마 있으면 태양에너지와 공기를 사야만 하는 시절이 오겠구나 싶다. 이번 전시에서 나는 이은희의 작업과 더불어 특히 최근의 소위 ‘Echo’, ‘Green' 등으로 시작되는 미술에서의 한 흐름들(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담화들)에 덧붙여서 좀 더 생각해볼 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언론에서건, 미술에서건, 일상생활에서건 최대 화두 중 하나인 ‘Green’ 담화들로부터 우리가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정도이다. 즉 한편에서는 자연을 또 다른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면서, 그로부터 얼마만큼의 이윤을 뽑아낼 것인 지에 골몰하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이윤내기, 경쟁하기 자체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삶이 전지구적으로, 대규모의 자연 재해 속에서 위협받는 가운데 일어나는 반성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반성일 것이다. 누구나 우리의 근대화, 도시화, 개발에서 파괴하고 있는 자연 혹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반성들은 한 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실감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유토피아는 물론 우리 곁에 어떤 흔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흔적은 배아와 같은 미래의 흔적일수도 있고, 화석과 같은 과거의 흔적일수도 있다. 단지 그것을 새로운 상품개발을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본다면, 한 편으로는 이러한 노스텔지어가 단지 새로운 고급 에너지 개발에 찬성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71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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